공지사항

금주의 성경통독 도우미(10/3-10/9)

Author
PBC
Date
2021-10-02 11:21
Views
22
본문: 렘 4-22장

1.개요
예레미야서는 유다 왕국의 암흑기 동안에 살던 유다의 위대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이 쓴 자서전이다. 배교, 우상숭배, 변질된 예배, 도덕적 타락 등이 예레미야가 살면서 활동했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심판이 장차 홍수처럼 밀려올것인데 예레미야는 이 메시지를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설교들에 대한 응답으로 이 하나님의 세심한 선지자는 동족들로부터 핍박, 구타, 격리, 수감 등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비록 반대와 핍박을 받기는 했지만 예레미야는 그의 많은 예언들이 실현되는 것을 생전에 목격했다. 바벨론 군대가 침략했으며 심판이 도래했다. 이것 때문에 비록 선지자의 마음이 찢어지는듯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가 확고히 입증되었다. 예레미야서는 제사장 도시인 아나돗에서 하나님께서 일찍이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의 예언을 기록한 책이다. 가슴 아픈 메시지를 가진 가슴 아픈 예언자로서 예레미야는 목이 굳은 유대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40년이 넘도록 선포하는 노고를 감당했다.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으면서 예레미야는 그의 신랄한 예언들을 눈물과 동정심을 가지고 증거했다. 그의 절박한 심정이 그로 하여금 본서와 같은 절박한 책을 기록하게 했는데 본서는 연대기적으로나 주제별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설교들과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충실하게 선포했다.

2.저자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었으며 예루살렘으로 부터 북쪽으로 3km 떨어진 아나돗에서 살았다. 유다 왕국에 대한 실물 교육의 한 방편으로서 그는 결혼하지 말라는 며령을 받았다(16:2). 바벨론 침략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의 극단적인 메세지 때문에 그는 심한 핍박을 겪어야 했다. 그는 고향인 아나돗에서 위협을 받았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 의해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으며 족쇄에 매이기도 했고 여호야김 왕에게서 위협을 느껴 도피했고 거짓 선지자인 하나냐에 의해서 공적으로 모욕을 받았으며 웅덩이에 던져지기도 했다.
본서는 예레미야를 그 저자로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1:1). 예레미야는 초기로부터 여호야김 왕 4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예언들을 그의 서기였던 바룩에게 구두로 서술했다. 왕에 의해서 그의 두루마리가 소실된 이후에 예레미야는 더 완전한 내용을 바룩에게 구술했고 또한 나중 내용도 저작되었다. 예레미야에 의해서 기록되지 않은 것은 52장뿐이다. 이 추가 내용은 열왕기하 24장 18절부터 25장 30절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며 아마도 바룩이 첨가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70년의 포로 기간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말하고 있다(25:11-14, 29:10, 단 9:2).

3.기록연대와 배경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그리고 에스겔 등과 동시대인 이었다. 그이 사역은 대략 기원전 627년으로부터 대략 580년까지에 걸쳐 나타났다.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인 요시야(기원전 640-609년)는 기원전 622년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때 영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치세 동안 순조롭게 활동하다가 그가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기원전 609년에 죽음을 당했을때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때 즈음에 바벨론은 이미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점령했다(기원전 612년). 여호아하스는 요시야를 대신해 유다의 왕이 되었지만 겨우 3개월 동안 치리했고 느고에 의해서 페위된 후 애굽으로 끌려갔다.
유다의 다음왕은 여호야김(기원전 609-597년)이었지만 바벨론이 기원전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퇴할때까지 애굽의 한 봉신으로서만 통치했다.
그 후 유다 왕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봉신이 되었지만 기원전 601년 예레미야의 경고를 거부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 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긴이 유다의 다음 왕이 되었지만 3개월 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때 시드기야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가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한 것은 오히려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예루살렘을기원전 586년에 점령하고 파괴하게 하는 구실을 주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사역에는 세 가지 단계들이 있다.
1). 기원전 627년부터 605년까지, 그는 유다가 앗수르와 애굽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 예언했다
2). 기원전 605년에서 586년까지는 유다가 바벨론의 위협과 침략을 받을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3). 기원전 586년부터 580년까지 그는 유다의 몰락이후에 예루살렘과 애굽에서 활동했다.

4.렘 4-22장
예레미야서는 유다 왕국이 암흑기 때에 유다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의 치세 동안에는 선지자로 불린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던 요시야의 종교 개혁도 배교의 흐름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족의 전체적인 타락은 예레미야가 사역했던 기간에 재위했던 4명의 불경건한 왕들의 기간 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백성들은 배교와 우상 숭배에 빠져 헤어날줄 몰랐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최초로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의 상태보다 더 악화되었다(3:11).
그들은 참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변질시켰고 영적, 도덕적 타락에 자신들을 방치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경청하기를 거절한 까닭에 온전한 치류를 위해서는 심각한 수술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임박한 일련의 심판들을 선포했다. 바벨론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것인데 이 나라의 이름은 본서에 164번 언급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반역하는 유다를 향해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했고 그 대가로 박해와 폭리, 격리, 수감 등을 당했다. 그의 동정심과 예민한 마음 때문에 그는 자기 나라의 타락과 임박한 운명을 슬퍼했다. 자신의 메시지가 극히 신랄했고 자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거듭 예언자 직분을 포기하려 했지만 유다가 비참한 최후를 당할 때까지 끝까지 잘 견디고 자기 직분을 잘 감당했다. 그는 거절과 박해를 받았던 외로운 눈물의 선지자였다.
예레미야서를 비록 연대적으로나 주제별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중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심판이 중단될 수는 없지만 회복의 약속들이 책전체에 산재해 나타나고 있다. 본서의 구분은 다음과 같다. 예레미야의 소명(1장), 유다를 향한 예언들(2-45장), 이방인들을 향한 예언들(46-51장), 예루살렘의 몰락(52장).
예레미야의 소명(1장)
예레미야는 출생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구별되었다. 예레미야서의 서론격인 1장은 예레미야의 신상과 선지자로서의 부름과 그가 받은 지침 등을 묘사하고 있다.
유다를 향한 예언들(2-45장)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비유들과 설교들 그리고 상징적인 행동을 통한 교훈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선지자의 삶 그 자체가 유다를 향한 일상적인 성격을 띤 예화라고 할 수 있는데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바 실물을 통한 교훈의 대부분들을 이 단락에서 찾을 수 있다(13:1-14, 14:1-9, 16:1-9, 18:1-8, 19:1-13, 24:1-10, 27:1-11, 32:6-15, 43:8-13).
12편의 생생한 일련의 설교들에서 예레미야는 유다에 임박한 심판들의 원인을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유다의 태도보다 거짓 신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태도가 더욱 충성스러웠다. 그들은 우상을 따름으로써 열매 없는 포도나무가 되어버렸고 변명의 여지를 잃고 말았다.백성들은 그들의 공허한 고백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영적인 간음 등으로 인해 질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당신에게 붙들어 매셨지만 썩은 허리띠처럼 부패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의 죄는 너무나 극식했으므로 선지자는 그들을 위해서 오로지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임박한 심판의 한 표적으로서 그는 결혼하거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금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