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성경통독 도우미(11/21-11/27)
Author
PBC
Date
2021-11-20 10:28
Views
320
본문: 옵 1장, 욘 1-4장, 미 1-7장, 나1-3장, 합 1-3장, 습 1-3장, 학 1-2장
*오바댜 1장
쌍둥이 형제(에서와 야곱, 창 27장)간의 다툼과 불화는 그들의 후대 백성들(에돔인과 이스라엘)간의 민족적인 적대감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이 적군들이 예루살렘의 문들을 부수려고 강타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에돔인들은 적군들을 돕는 자들이 되었다. 자신들의 형제국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지 않은 까닭에 에돔인들은 언젠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 배경을 알 수 없는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이 어덯게 영원히 멸절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변호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세상의 심판주로 인식될 것인지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는 엘리사와 동시대인이며 요엘보다 몇 년 더 앞서므로 가장 초기이 기록 선지자이다. 오바댜가 예언한 것 같이 에돔사람들은 영원히 멸절된다.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멸망당할때 이를 즐거워했지만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을 방어하려다고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오바댜의 첫번째 주제는 에돔의 고만과 유다를 향한 포악성으로 인해 에돔에게 임할 심판의 선포다. 두번째 주제는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에서와 야곱사이의 갈등은 그들의 후손인 에돔과 이스라엘 국가 사이의 끊임없는 분쟁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에돔(에서)은 유다(야곱)에 대해 형제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했고 야곱의 후손들을 향한 그한 적대심을 천년이 넘도록 가져왔다. 이같은 민족 차원의 경쟁 관계는 이스라엘이 외세에 의해 패배당하고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것을 예돔인들이 관망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에돔은 자신의 형제국에 대해 보호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약탈에 동참했다.
오바댜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이지만(21절) 구약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에돔을 향해서는 회개의 촉구나, 위로 소망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에돔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조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향해 철저한 파멸을 가져오실 것이며 그들에게는 남은 자들도 없을 것이다. 오바댜서는 에돔을 향한 고발과 기소와 판결을 완벽하게 기록함으로써 마치 법정에서 재판받는에돔이 하루 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바댜는 세상을 심판하는 분이 어떻게 에돔이 교만을 파하시며 야곱의 집을 회복시키실 것인지를 묘사했다. 에돔을 향한 심판(1-18절)과 이스라엘의 회복(19-21절)로 구분된다.
에돔을 향한 심판(1-18절)
오바댜의 첫 단락은 에돔에게 임할 파멸이 조건적인 아닌 확실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에돔은 사해 남부의 산악지대인 세일산의 유리한 지형적 위치에 힘입어 교만해졌다(3절). 수도 셀라(또는 페트라)는 적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좁은 협곡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도적이라도 모든 것을 다 훔쳐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에돔을 멸하실때에는 그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다. 이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10-14절은 예루살렘이 약탈을 방관하는 에돔이 막중한 죄악을 묘사하고 있다. 에돔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 즐거워했고 그들과 같이 행동했다. 유다의 협조자가 되어야 할 때에 오히려 그들은 유다를 대항하는 적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에돔은 임박한 주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19-21절)
마지막 구절들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에돔과 블레셋까지도 차지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고 있다.
*욘 1-4장
니느웨는 북동쪽에 위치했고 다시시는 서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사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게 하셨을 때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고 그 대신 다시스로 향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하는 바를 좌절시키시고(그를 배에서 바다로 던지심으로써) 또한 그를 보호하시므로써(물에서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니느웨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했고 이를 위해 요나는 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성공적인 것이었던 것에 반해 그 선지자는 이에 화를 내고 낙담하는데 그는 먼저 죄악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이 긍휼을 배워야 했다. 요나는 비둘기 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이름이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와 동시대인으로서 엘리사 시대 이후와 아모스, 호세아 시대 직전에 활동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부흥과 번영의 기간을 누리고 있었다.
요나가 활동할 즈음에는 앗수르의 잔혹성이 극에 달했다. 포로들에 대한 그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고대 앗수르 문헌들, 특히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 사이의 무헌들에게 발견되었다. 니느웨 백성의 회개는 아마도 아수르단 3세(기원전 773-755년)의 치리 기간에 일어났을 것이다. 두 차례의 재난(기원전 765년, 759년)과 일식(기원전 763년) 현상은 니느웨의 백성들로 하여금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를 경청하도록 했을 것이다.
요나서는 그 메시지와 이를 전달하는 자로 인해 특이한 책이다.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요나서는 특별히 한 이방 나라를 중심으로전개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약 백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전령은 앗시리아인들이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긍휼의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 메시지를 선포하기를 원치 않고 주저했던 선지자였다. 본서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폭풍, 제비뽑기, 사공들, 물고기, 니느웨 사람들, 식물, 벌레, 동풍 등-가운데서 오직 요나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실패했다. 이 모든 것들은 요나에게 긍휼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나서 4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요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사명 위임(1-2장) 그리고 요나에게 주어진 두번째 사명 위임(3-4장)이다.
요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사명 위임(1-2장)
1장은 요나의 소명과 불순종 그리고 요나를 향한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
께서 극악 무도한 앗수르 인들을 살려두시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에게 회개를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적국을 돕는 것과도 같았다. 애국심에 젖은 요나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우선에 두었고 니느웨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거부했다. 북동쪽으로 800km 떨어진 니느웨로 가는 대신 요나는 서쪽으로 3200km 떨어진 다시스(스페인)로 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결과를 성취하시기 위해 일련의 기발한 대응책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요나의 수고는 허사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구원하시기 우해 ‘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마른땅으로 그를 건져내셨다. 물에 빠진 자신을 물고기를 통해 극적으로 삼키게 하신 절묘한 사건은 요나에게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쳐 지났갔을 몇몇 시편들을 암시해주는 선언적인 찬양시를 하나님께 드렸다(시 3:8, 31:32, 42:7, 69:1).
그의 기도의 골방에서 요나는 물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가 구원은 여호와께서로서 말미암나이다(2:9) 라고 시인했을때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것이 되어 사용되기를 자원했다. 해안으로 건짐을 받은 후 요나는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니느웨 성으로 향해 가는 긴 시간동안 자신의 경험에 대해 숙고했다.
요나에게 주어진 두번째 사명 위임(3-4장)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두번째 소명에 순종했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눅 11:30).
그의 살갗이 물고기 백속에서 변색되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 선지자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실물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성을 지나면서 선포한 한 문장의 설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좋은 반응을 가져온 복음 증거였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요나의 선포가 있은 후에 금식하고 회개하라는 그 나라 왕의 조서가 내려졌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 마지막 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요나의 분노와 결핍된 긍휼에 비교되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지가 가져온 좋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넝쿨 하나와 벌레 한 마리, 그리고 동풍을 사용하셔서 요나에게 긍휼에 대해 교훈 하셨다.
요나의 감정은 들끊는 분노에서, 무력감으로, 그리고는 큰 기쁨에, 마침내 절망감(자포자기)으로 뒤바뀌었다. 재미 있으면서도 의미 심장한 이 사건을 통해 요나는 자신이 수십만 명의 사람들(4장 11절이 어린이만 12만 명임을 의미한다면 전체 인구수는 60만명 정도)보다도 하나의 넝쿨에 더 관심을 가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요나의 이해 부족 때문에 요나의 회개는 니느웨의 회개보다 더 큰 문제를 드러내었다.
*미 1-7장
미가는 유다에 사회적 불의가 팽배했던 기간 동안 예언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귀를 위해 설교했다. 왕들은 잔혹함, 폭력, 그리고 부패에 물들어 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을 위해 봉사했다. 지주들은 가난하고 소외당한 과부들로부터 착취했고 재판관들은 니물에 눈이 어두웠다. 장사꾼들은 저울과 추를 속여 사용했다. 사회 각 분야마다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필연적으로 선포되어져야 했다. 미가는 민족의 죄악들, 궁극적으로 파멸과 포로 생활을 초래할 죄악들을 열거했다. 하지만 이 암울한 메시지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한 전능한 구원자가 장차 나타날 것이고 정의가 땅에 편만해질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정의가 밭에 짓밟히고 있지만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나1-3장
니느웨는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진 성이었다. 높은 성벽들로 둘러쌓였고 2백 개의 성루들로 요새화되었으며 깊은 해자로 둘러쌓여진 이 성은 진실로 무너질 수 없는 난공블락의 요새였다. 적어도 니느웨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선지자 나훔에 의하며 이처럼 거만한 성과 그 주민들조차도 하나님의 진노앞에 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요나 때의 놀랄만한 부흥 이후 150년이 지나자 니느웨 백성들은 그들의 불경스럽고 부도덕한 태도로 되돌아갔다.
나훔의 설교는 회개에의 요청(요나의 경우처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심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백성에 대한 멸망의 선포였다.
*합 1-3장
모국 유다를 돌아보앗을때 하박국은 백성들의 손마다 가득한 폭력과 불의를 목도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어지하여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번영하며 어찌하여 의인들이 짓밞힘을 당하고 또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런 사악한 시대에 가만히 계시며 무관심하신지 물으며 호소했다.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의 상태보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지자에게 확신시켜주셨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보다 더욱 부패한 민족인 갈대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
*습 1-3장
*학 1-2장
*오바댜 1장
쌍둥이 형제(에서와 야곱, 창 27장)간의 다툼과 불화는 그들의 후대 백성들(에돔인과 이스라엘)간의 민족적인 적대감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이 적군들이 예루살렘의 문들을 부수려고 강타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에돔인들은 적군들을 돕는 자들이 되었다. 자신들의 형제국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지 않은 까닭에 에돔인들은 언젠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 배경을 알 수 없는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이 어덯게 영원히 멸절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변호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세상의 심판주로 인식될 것인지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는 엘리사와 동시대인이며 요엘보다 몇 년 더 앞서므로 가장 초기이 기록 선지자이다. 오바댜가 예언한 것 같이 에돔사람들은 영원히 멸절된다.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멸망당할때 이를 즐거워했지만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을 방어하려다고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오바댜의 첫번째 주제는 에돔의 고만과 유다를 향한 포악성으로 인해 에돔에게 임할 심판의 선포다. 두번째 주제는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에서와 야곱사이의 갈등은 그들의 후손인 에돔과 이스라엘 국가 사이의 끊임없는 분쟁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에돔(에서)은 유다(야곱)에 대해 형제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했고 야곱의 후손들을 향한 그한 적대심을 천년이 넘도록 가져왔다. 이같은 민족 차원의 경쟁 관계는 이스라엘이 외세에 의해 패배당하고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것을 예돔인들이 관망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에돔은 자신의 형제국에 대해 보호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약탈에 동참했다.
오바댜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이지만(21절) 구약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에돔을 향해서는 회개의 촉구나, 위로 소망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에돔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조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향해 철저한 파멸을 가져오실 것이며 그들에게는 남은 자들도 없을 것이다. 오바댜서는 에돔을 향한 고발과 기소와 판결을 완벽하게 기록함으로써 마치 법정에서 재판받는에돔이 하루 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바댜는 세상을 심판하는 분이 어떻게 에돔이 교만을 파하시며 야곱의 집을 회복시키실 것인지를 묘사했다. 에돔을 향한 심판(1-18절)과 이스라엘의 회복(19-21절)로 구분된다.
에돔을 향한 심판(1-18절)
오바댜의 첫 단락은 에돔에게 임할 파멸이 조건적인 아닌 확실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에돔은 사해 남부의 산악지대인 세일산의 유리한 지형적 위치에 힘입어 교만해졌다(3절). 수도 셀라(또는 페트라)는 적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좁은 협곡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도적이라도 모든 것을 다 훔쳐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에돔을 멸하실때에는 그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다. 이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10-14절은 예루살렘이 약탈을 방관하는 에돔이 막중한 죄악을 묘사하고 있다. 에돔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 즐거워했고 그들과 같이 행동했다. 유다의 협조자가 되어야 할 때에 오히려 그들은 유다를 대항하는 적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에돔은 임박한 주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19-21절)
마지막 구절들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에돔과 블레셋까지도 차지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고 있다.
*욘 1-4장
니느웨는 북동쪽에 위치했고 다시시는 서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사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게 하셨을 때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고 그 대신 다시스로 향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하는 바를 좌절시키시고(그를 배에서 바다로 던지심으로써) 또한 그를 보호하시므로써(물에서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니느웨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했고 이를 위해 요나는 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성공적인 것이었던 것에 반해 그 선지자는 이에 화를 내고 낙담하는데 그는 먼저 죄악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이 긍휼을 배워야 했다. 요나는 비둘기 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이름이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와 동시대인으로서 엘리사 시대 이후와 아모스, 호세아 시대 직전에 활동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부흥과 번영의 기간을 누리고 있었다.
요나가 활동할 즈음에는 앗수르의 잔혹성이 극에 달했다. 포로들에 대한 그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고대 앗수르 문헌들, 특히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 사이의 무헌들에게 발견되었다. 니느웨 백성의 회개는 아마도 아수르단 3세(기원전 773-755년)의 치리 기간에 일어났을 것이다. 두 차례의 재난(기원전 765년, 759년)과 일식(기원전 763년) 현상은 니느웨의 백성들로 하여금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를 경청하도록 했을 것이다.
요나서는 그 메시지와 이를 전달하는 자로 인해 특이한 책이다.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요나서는 특별히 한 이방 나라를 중심으로전개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약 백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전령은 앗시리아인들이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긍휼의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 메시지를 선포하기를 원치 않고 주저했던 선지자였다. 본서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폭풍, 제비뽑기, 사공들, 물고기, 니느웨 사람들, 식물, 벌레, 동풍 등-가운데서 오직 요나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실패했다. 이 모든 것들은 요나에게 긍휼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나서 4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요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사명 위임(1-2장) 그리고 요나에게 주어진 두번째 사명 위임(3-4장)이다.
요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사명 위임(1-2장)
1장은 요나의 소명과 불순종 그리고 요나를 향한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
께서 극악 무도한 앗수르 인들을 살려두시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에게 회개를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적국을 돕는 것과도 같았다. 애국심에 젖은 요나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우선에 두었고 니느웨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거부했다. 북동쪽으로 800km 떨어진 니느웨로 가는 대신 요나는 서쪽으로 3200km 떨어진 다시스(스페인)로 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결과를 성취하시기 위해 일련의 기발한 대응책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요나의 수고는 허사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구원하시기 우해 ‘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마른땅으로 그를 건져내셨다. 물에 빠진 자신을 물고기를 통해 극적으로 삼키게 하신 절묘한 사건은 요나에게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쳐 지났갔을 몇몇 시편들을 암시해주는 선언적인 찬양시를 하나님께 드렸다(시 3:8, 31:32, 42:7, 69:1).
그의 기도의 골방에서 요나는 물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가 구원은 여호와께서로서 말미암나이다(2:9) 라고 시인했을때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것이 되어 사용되기를 자원했다. 해안으로 건짐을 받은 후 요나는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니느웨 성으로 향해 가는 긴 시간동안 자신의 경험에 대해 숙고했다.
요나에게 주어진 두번째 사명 위임(3-4장)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두번째 소명에 순종했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눅 11:30).
그의 살갗이 물고기 백속에서 변색되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 선지자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실물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성을 지나면서 선포한 한 문장의 설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좋은 반응을 가져온 복음 증거였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요나의 선포가 있은 후에 금식하고 회개하라는 그 나라 왕의 조서가 내려졌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 마지막 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요나의 분노와 결핍된 긍휼에 비교되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지가 가져온 좋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넝쿨 하나와 벌레 한 마리, 그리고 동풍을 사용하셔서 요나에게 긍휼에 대해 교훈 하셨다.
요나의 감정은 들끊는 분노에서, 무력감으로, 그리고는 큰 기쁨에, 마침내 절망감(자포자기)으로 뒤바뀌었다. 재미 있으면서도 의미 심장한 이 사건을 통해 요나는 자신이 수십만 명의 사람들(4장 11절이 어린이만 12만 명임을 의미한다면 전체 인구수는 60만명 정도)보다도 하나의 넝쿨에 더 관심을 가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요나의 이해 부족 때문에 요나의 회개는 니느웨의 회개보다 더 큰 문제를 드러내었다.
*미 1-7장
미가는 유다에 사회적 불의가 팽배했던 기간 동안 예언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귀를 위해 설교했다. 왕들은 잔혹함, 폭력, 그리고 부패에 물들어 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을 위해 봉사했다. 지주들은 가난하고 소외당한 과부들로부터 착취했고 재판관들은 니물에 눈이 어두웠다. 장사꾼들은 저울과 추를 속여 사용했다. 사회 각 분야마다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필연적으로 선포되어져야 했다. 미가는 민족의 죄악들, 궁극적으로 파멸과 포로 생활을 초래할 죄악들을 열거했다. 하지만 이 암울한 메시지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한 전능한 구원자가 장차 나타날 것이고 정의가 땅에 편만해질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정의가 밭에 짓밟히고 있지만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나1-3장
니느웨는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진 성이었다. 높은 성벽들로 둘러쌓였고 2백 개의 성루들로 요새화되었으며 깊은 해자로 둘러쌓여진 이 성은 진실로 무너질 수 없는 난공블락의 요새였다. 적어도 니느웨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선지자 나훔에 의하며 이처럼 거만한 성과 그 주민들조차도 하나님의 진노앞에 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요나 때의 놀랄만한 부흥 이후 150년이 지나자 니느웨 백성들은 그들의 불경스럽고 부도덕한 태도로 되돌아갔다.
나훔의 설교는 회개에의 요청(요나의 경우처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심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백성에 대한 멸망의 선포였다.
*합 1-3장
모국 유다를 돌아보앗을때 하박국은 백성들의 손마다 가득한 폭력과 불의를 목도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어지하여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번영하며 어찌하여 의인들이 짓밞힘을 당하고 또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런 사악한 시대에 가만히 계시며 무관심하신지 물으며 호소했다.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의 상태보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지자에게 확신시켜주셨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보다 더욱 부패한 민족인 갈대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
*습 1-3장
*학 1-2장